우리는 스스로 안전할 수 있다
―이태원 참사 현장 추모 방문 보고
이태원 쪽으로는 자주 다니지 않았습니다. 녹사평역 방면으로 가면 커다란 신발을 파는 가게들이 있기에, 제 발에 맞는 제품이 있나 기웃거린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지난 목요일에는 다른 이유로 이태원을 찾았습니다. 말랑키즘 안의 분과인 서울대학교 아나키즘 소모임 "검은 학" 명의로 학내에 붙인 대자보를, 사건 현장에도 게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몇 번 방문하지 않아 본 제게도, 참사가 일어난 이태원역 1번 출구는 익숙한 길거리였습니다. 수도권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 가본 적 있는 곳, 이태원은 그런 장소인가 봅니다. 그러나 그 풍경을 낯설게 하는 것은 역시 수북하게 쌓인 국화꽃과 추모의 글귀,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 그리고 섬뜩하게 뻗은 골목길 어귀에 쳐진 폴리스라인이겠지요. 모두의 일상이었던 곳에서 한 순간에 그토록 많은 삶이 꺼져 버렸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고 또 두렵게 합니다. 그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태원역에 비늘처럼 수 놓인 쪽지들에는 하나같이 참사를 막지 못했다는 회한과 안전한 사회를 바라는 열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멀리는 8년 전 세월호 참사부터 가깝게는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평택 SPL 제빵공장 사고까지, 수많은 사례가 다시금 언급되며 “안전”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돌아왔습니다. 누군가는 이 재난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또 누군가는 우선 추모에만 집중하자고 말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더 기다릴 수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안전을 의논해야 할 때이며, 더 이상 늦기 전에 안전을 위해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생각해 보면 안전이라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충분한지 알 수 없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참사 앞에서 공포에 떨며 원인이 무엇인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를 묻습니다. 오늘날 안전의 책임을 위임받은 국가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음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그 해결책이 더욱 강한 공권력이라는 주장과 이에 은근슬쩍 편승하려는 정치계의 모습이 우리는 우려스럽습니다. 한 번 실패한 방법을 되풀이하며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사가 발생하기 몇 시간 전부터 경찰에 접수된 수많은 신고의 녹취록을 보셨을 겁니다. 현장에서의 절박한 요청들이 있었지만 수화기 너머로는 "일상적인 불편 신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강한 공권력이 있어도 그들은 당사자가 될 수 없기에, 우리가 부르짖을 때 언제나 우리를 구해줄 수는 없습니다. 지금 한동안은 괜찮겠지요. 그러나 두 번, 세 번, 시간이 지나며 경각심이 흩어지고 나서도 그럴까요? 설령 모든 축제와 모임에 경찰력이 배치되어 우리를 통제한다고 한들, 그 통제는 너무 약해 사고를 막지 못하거나 너무 강해 사람들의 자유를 짓누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유를 찾아 공권력이 없는 다른 장소에 모여들게 될 것이고, 언젠가 우리는 또 다른 참사 앞에서 울고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남에게 의탁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안전의 외주화입니다. 우리는 현장 바깥에 있는 공권력이 아닌, 당사자인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안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번 참사에서 전해진 비보와 함께 우리는 또 다른 위기를 막아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현장에서 소리 높여 인파를 정리한 시민과 경찰관, 발 벗고 나서 이웃을 살려낸 수많은 의인이 그들입니다. 이처럼 체제의 한계 너머에서 언제나 우리를 구해 주는 것은 상호부조와 직접 행동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그 정신이 없다면 그 어떤 인위적인 체제도 작동할 수 없기에, 우리가 늘 되새기고 실천해야 할 것 역시 그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더욱 강하게 연대해야 합니다.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앞장서야 합니다. 이웃의 안전이 곧 우리의 안전이기 때문입니다.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과 상권의 주민들 모두가 서로의 이웃입니다. 그리고 그 이웃의 안전을 위해 우리는 스스로를 조직해야 합니다. 누군가 주최한 행사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모여들 시기가 되면 상인회는 안전을 위해 위원회를 꾸려야 합니다. 기금을 조성하고, 통행로를 정비하고, 안전 요원을 모집해야 합니다. 참가자들 역시 주체적으로 안전을 위해 협의하고, 그 결과로 정해진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모두의 안전을 모두가 자발적으로 책임질 때, 외부에서의 강제가 끼어들 자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강제 대신 협의를 통해 규칙을 정할 때야말로 더 나은 결과가 있을 수 있기에,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안전하면서도 자유롭고, 자유로우면서도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
꽃들과 함께 놓인 희생자들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 남겨진 유족들과 친구들의 가슴 저미는 작별 인사 또한 읽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일을 하고 있었을지도, 여가를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의심 없이 일상을 보내던 저와 당신, 우리 곁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이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놓여 있습니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책임자를 처벌하고 통제를 강화한 다음, 이제는 안전할 것이라 믿으며 단잠에 빠지시겠습니까? 혹은 개인의 책임으로 원인을 돌리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외면하시겠습니까? “우리들의 상호부조”, 말랑키즘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스스로의 안전을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상호부조의 원칙 아래 모두와 함께 연대해 나가겠습니다. 우리 손으로 만든 안전만이 진정한 안전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안전할 자유를 다른 이에게 맡겨 버리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안전하지도 자유롭지도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022년 11월 6일
‘우리들의 상호부조’, 말랑키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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