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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성명 및 활동

우리는 자유롭기에, 자유로워야 하기에―이태원 참사를 애도하며

by 말랑키즘 2022. 11. 1.

우리는 자유롭기에, 자유로워야 하기에

이태원 참사를 애도하며

 

 

   ‘다만 나는 그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좀 외로웠다. 아무도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고립감. 그리고 그걸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하는 갑갑함이 밀려왔다. 수면 위로 아른아른 조용하게 빛나는 여름 햇빛이 보였다.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유혹하듯 화사하게 출렁이던 차안의 얇고 환한 막. 나는 그 빛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손에 걸리는 거라곤 쥐자마자 이내 부서지는 몇 움큼의 강물이 전부였다. 생전 처음 겪는 공포가 밀려왔다. 아득하고 설명이 안 되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소설가 김애란은 그의 소설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서 주인공이 어렸을 적 물에 빠졌을 때의 기억을 위와 같이 묘사한다. 인간에게 가장 두렵고 끔찍한 일은 어떤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상황을 바꿀 수도, 빠져나올 수도 없다는 것이다. 지난 주말, 이태원에서 너무도 황망하게 생을 마친 이들의 그 공포, 그 외로움, 그 고통을 차마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번 참사로 목숨을 잃은 모든 이들 앞에 통곡한다.

 

   어찌 비하겠느냐마는, 이 비참한 소식을 접한, 그저 운이 좋아 살아남은 모두 역시 뭘, 얼마나,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공포에 휩싸여 있는 듯하다. 정부는 참사가 벌어지고 만 하루도 지나기 전 국가 차원에서의 애도 기간을 설정하고, 뒤이어서는 주최자 없는 자발적 집단행사에도 정부가 개입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우려했던 것과 같이, 많은 이들 역시 이번 참사가 중앙 정부, 지방자치단체를 가릴 것 없이 더 많은 공권력을 투입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이게 맞는가?

   공권력을 더 투입하면 물론 보다 안전할 수도(아닐 수도) 있고, 그럼에도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 때 명확히 책임의 소재를 공권력에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일본의 경우 올해 핼러윈, 시부야 일대에 350명 가량의 경찰을 투입했고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이동하라고 안내하는 이른바 DJ 폴리스가 투입되었다. 더구나 시부야구는 2018년 이래로 조례를 제정해 핼러윈 기간 동안 오후 6시부터 오전 5시까지 길거리, 공원 등 야외에서 음주 행위를 금지했다. 시부야구가 직접 노상 음주 행위 금지를 알리는 영상을 시내에서 틀어대고, 주요 장소에 AI 기술로 통행하는 인원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범 카메라를 설치했다.

 

   안전할 수야 있을 것이다. 원래 확률적으로 언제나 비교적 가장 안전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 정부는, 그리고 정부에게 이 모든 일의 책임이 있다고 하는 이들은 핼러윈에 왜 청년들이 이태원으로 몰리는지 그 이유는 전혀 생각해본 적도,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얼른 책임 소재나 정하고 얼른 다 때려 막아서 사태를 해결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가?

   왜 그 많은 사람들이 매년 10월 마지막 주말 이태원을 찾는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답은 전혀 어렵지 않다. 바로 자유라는 공기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 자유는 누군가 하지 말라고 해서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억지로 막는다면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평소 전혀 자유로울 일도, 재밌을 일도 없는 2022년 한국 사회에서 모두가 자유롭고 즐거울 수 있는 공간을 청년들은 직접, 아무도 주관하지 않고 유도하지도 않았으나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데에는 평소에 아무런 관심도, 생각도 없다가 사건이 터지니 이것을 아예 없애버리겠다는 태도는 잘못되어도 한참이 잘못되었다.

   필자는 우연히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다음 날 일본을 방문해야 했다. 일본 역시 핼러윈 분위기가 도쿄 도내에 감돌고 있기는 했으나, 그간 한국에서 보던 풍경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정말 솔직히 말해서, 전혀 재밌어 보이지도, 그래서 함께 어울리고 싶거나 놀고 싶은 마음이 동하지도 않았다. 정부는, 정부가 공권력을 더 투입해야 한다는 이들은 정녕 이런 살풍경을 원한다는 말인가?

 

   안전을 도외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정부나 지자체가 주관하는 것도, 주관할 수도 없는 일에 그들의 책임을 운운하며 통제를 들이대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문제의 본질조차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게으름이자 타성이요, 무능함이자 멍청함, 그리고 비겁의 극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안전은 당연히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안전하면서도 자유를 포기할 수 없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쩌자는 이야기인가.

   우리의 안전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이 없을 것이다. 아무도 우리의 안전을 대신 책임져 주지 않는다. 정부는 안전이라는 이유로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려 하고, 지자체는 자신들은 최선을 다했다는 말로 우리의 안전을 지킬 의지도 무엇도 없음을 이미 드러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 우리가 안전할 수 있는 대책을 찾아야 한다.

   서울대학교는 축제 기간이 되면 그 축제를 직접 기획하고 진행, 총괄하는 단체가 꾸려진다. 축하사, 즉 축제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단체가 그것이다. 아무도 축제를 하라고 등을 떠밀지도, 하지 말라고 막지도 않는다. 하지만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는 축제를 즐기는 이들이 직접 축제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이 당연히 맞을 것이다. 이태원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누구도 이태원으로 모이라고 지시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때가 되면 모두가 모인다. 그렇다면 이태원에 모일 우리가 직접 핼러윈 기간 중 더 안전할 수 있게, 그리고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임시 자경단을 꾸리자. 또한 이태원에 모인 이들로 대목을 맞는 주변 상권에 그 몫의 일부를, 그들에게 돈을 벌게 해주는 이들의 안전을 위해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하자. 핼러윈 기간 중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더 고용해 임시 자경단과 함께 안전 유지를 위해 노력해 달라고 요구하자. 이 정도는 충분히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사족을 덧붙이자면, 정부가 이 자유를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고인에 대한 능욕이자 최악의 모욕임을 다시 한번 언급하고 싶다. 너희는 내버려 두면 스스로 안전할 수도 없으니까 내가 나서서 너희를 통제하고 가둬서 안전하게 하겠다는 말이야말로 이번 참사의 책임을 목숨을 잃은 이들 개개인에게 돌리는 말과 같다.

   아울러 정부가 애도의 기간을 설정하는 것 역시 우습고 슬픈 일이다. 애도는 모든 이가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며 이 충격에서 딛고 일어설 수 있을 때 끝나는 것이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기간을 정해서 슬퍼하고 땡 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이태원에 그 많은 사람이 왜 모이는지조차 생각하지 않는 정부의 나태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재차 강하게 비난한다.

 

   앞서 인용한 소설의 바로 다음 문장은 이렇다. ‘그런데 그때 누가 내 손을 잡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자유롭기에, 자유로워도 더 안전할 수 있으며 더 즐거울 수 있기에, 그리고 또 자유로워야 하기에, ‘우리들의 상호부조’, 말랑키즘은 이 슬픔과 고통에서 눈을 돌리지도, 거기에 매몰되지도 않겠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더 안전하면서도 즐겁고 자유로울 수 있다. 비록 우리 모두의 안일함으로 자율적인 준비가 늦었지만, 고인들을 가장 정중하게 애도하는 방법이 여기 있음을 우리는 확신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다 해나가도록 하겠다. 다시 한번 이번 참사의 모든 희생자를 기린다.

 

 

2022111

우리들의 상호부조’, 말랑키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