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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성명 및 활동

〈비정규직 이제그만 원청이 책임져라! 집회 참가 보고〉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22. 10. 10.

Photo by 전병철 공공운수노조 공무직지부 중구청지회장

비정규직 이제그만 원청이 책임져라! 집회 참가 보고

 

 

   2022108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의 주최로 집회가 열렸다. 집회는 대흥역 4번 출구를 나오자마자 보이는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건물 앞에서 규탄 집회를 가진 후 광화문 광장까지 행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우리들의 상호부조’, 말랑키즘도 여기에 함께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달리 노동 방식, 노동 시간, 고용의 지속성 등을 보장받지 못하는 고용 형태이다. 딱딱해 보이는 이 말을 풀어놓으면 이렇게 된다. 임금은 최저임금과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인 경우가 많고, 휴식 시간과 공간이 보장되지 않고, 동일한 노동임에도 정규직 직원과는 임금의 차이가 있고, 휴가를 쓸 수 없기도 하고, 성과급은 정규직에 비해 적고, 경력이 쌓이고 숙련이 되어도 임금은 오르지 않거나 오르더라도 정규직보다 덜 오르고, 회사의 상황에 따라 언제든 편한 해고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정규직들에게 차별의 눈총을 받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들로 낙인이 찍히기도 하고, 하청은 자신들에게 문제를 해결할 권한이 없다고 말해 원청으로 가면, 원청은 자신들이 비정규직을 직접 고용한 것이 아니니 책임이 없다며 하청으로 가라고 하고, 일하느라 다쳐도 산재를 인정받기 힘들고, 때로는 법제상 노동자로서 인정받지 못하기도 하고, 그래서 노조를 조직하거나 파업을 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할 때가 많고, 그래도 해야겠어서 하면 불법이라고 재판을 받고.

   이 말을 사용자 입장에서 바꿔 말하면 비정규직이란 언제든 편하게 썼다가 버릴 수 있는 손쉬운 비용 절감의 수단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 비정규직이 이제 1,100만 시대라고 한다. 민주당 정권에 기대를 건 이들도 있었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비정규직으로 힘들게 일하며 사는 사람들이 놓인 자리가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 그러니까 노오력이 부족해서 만들어진 결과일까? 자신의 잘못이기 때문에 찍소리 않고 불평등한 대우를 감당해야 할까? 그렇다면 반대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자리는 온전히 자신의 노력 100%만으로 이루어진 결과인가? 그 사람들이 그 자리에 가기까지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선천적인 재능(그게 우리가 흔히 머리라고 부르는 것이든 무엇이든), 그 재능이 발휘될 수 있도록 키워줄 수 있는 주변의 환경, 사회에 진출하기 전까지 비교 우위에 이르는 조건들(대학 합격증 같은 그 밖의 스펙들)을 쌓아갈 수 있게 하는 가정의 경제적 안정과 같은 것들이 없었다면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행진하는 중간에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조용히 좀 살자고 말하는 사람을 마주쳤다. 그 사람은 아마 앞서 말한 오해들에 단순하게 라고 대답할 만한 사람일 것이다. 자기 입장만을 생각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2시간가량의 행진 끝에 광화문 광장에 있는 세종문화회관에 도착했다. 우리는 광화문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올라 마무리 집회를 했다. 필자는 팔뚝질을 하는 무리에 섞여 그 광경을 내려다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무수히 많은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을 거닐고 있었는데, 우리 집회에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다수는 무슨 소리가 나네?’ 정도의 표정으로 힐끔 바라보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다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하필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서는 무슨 한복 축제도 열리고 있어 시민들의 집중도는 그쪽으로 몰렸다. 그쪽은 무대에 음향 장비를 쭉 깔아놓아 행사 진행자가 조곤조곤 단정한 말투로 말해도 광장 전체에 소리가 전달되었다. 반면 이쪽은 마이크 두 개를 한꺼번에 들고 큰 목소리로 발언을 해도 소리가 잘 퍼지지 못했다.

   사실 필자는 광화문 거리를 그냥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지나쳐 다니는 시민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실제로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마주쳤던 노동 집회들은 신기하게만 보였고, 시민들은 그 옆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필자 역시 고개를 힐끔 돌렸다가 다시 걸음을 옮기는 시민들 틈에 섞여 있었다. 그래도 이상하다는 느낌은 있었다. 분명 이상했다. 필자는 목에 핏대 세워가며 싸우자고 투쟁하자고 말하는 사람들과 나의 입장이 왜 그렇게 다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광화문 광장에서 우리를 외면하고 지나치는 시민들의 머릿속에 무슨 대단한 생각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삐딱하게 서서 노려보고 있던 몇몇을 제외하고는. 필자가 생각하기에 시민들은 그냥 자기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뿐이지 싶다. 그냥 나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자기 일이 아닌 일에 관심을 쏟는 것은 매우 피곤한 짓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 내일 무슨 맛있는 메뉴를 먹을지, 주말에 어디로 놀러 나갈지, 쇼핑하러 가서 무슨 옷을 살지와 같은 것이다. 필자는 이것들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필자에게도 우리에게도 이런 고민들은 행복의 조건이다. 우리도 주말에 집회하고 시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아이의 손을 잡고, 가족의 손을 잡고, 친구의 손을 잡고 편하게 놀러 다니고 싶다.

   그러니 알아줬으면 하는 것이 있다. 당신들이 밟고 있는 광장의 보도블럭, 살고있는 집, 입고 있는 옷 등, 그러니까 쓰는 거 입는 거 먹는 거 그 모든 것들이 사람으로부터 만들어지고 유통된다는 사실이다. 새벽 시간에 광장의 보도블럭 공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집이 지어질 때 일용직으로 일했던 사람들이 있고, 집에 쓰일 시멘트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시멘트의 원료를 채취하는 사람들이 있고, 시멘트를 공사 현장까지 운반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것에 노동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각자 소중한 사람이고,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다.

   그러니 알아줬으면 한다. 지금 당신들이 광화문 거리를 걸며 누리는 자유는 당신들만의 자유라는 것을. 여기에 자유롭지 않은, 그래서 자유롭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20221010

우리들의 상호부조’, 말랑키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