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지개색 군화로도 짓밟히지 않겠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억압이 지금보다 더 폭력적이고 당연하게 여겨지던 1969년 6월 28일, 당시 주기적으로 행했듯 뉴욕 경찰은 스톤월Stonewall 바를 검거했다. 스톤월은 뉴욕의 여느 게이바와 다를 것 없이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렌스젠더 등의 성소수자들이 즐겨 찾던 바였으나, 그날은 어찌 된 일인지, 바의 이용객들이 경찰의 폭력에 직접적으로 맞섰다. 체포를 진행하던 경찰을 가로막고, 경찰이 점거한 바를 에워싸고, 경찰 동료를 구하러 온 특공대와 기동대에 대항해 싸웠다. 그날의 싸움은 결국 며칠간의 봉기로 이어졌고, 그 시점 이후로 LGBT 해방운동이 시작됐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열리는 “퀴어 퍼레이드”, 즉 “프라이드Pride”는 그 스톤월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된 축제다.
2022년 7월 16일, ‘우리들의 상호부조’, 말랑키즘과 서울대학교 아나키즘 소모임 ‘검은 학’은 서울광장에서 열린 서울 프라이드에 참여했다. 필자는 활동 보고문을 작성할 때 일인칭을 사용하는 개인적인 글쓰기를 지양하지만, 이번 글의 주제 때문에 개인적인 얘기를 풀겠다.
필자는 퀴어다. “퀴어”나, “양성애자”, “젠더플루이드” 등의 단어는 한참 뒤에나 습득했지만, 내가 비非이성애자이고 비시스젠더임은 항상 알고 있던 사실이다. 아나키즘에 눈을 뜨게 되면서 가장 먼저 접한 이론이 “퀴어 아나키즘”이었던 것은 이 탓이었나보다. 아니, 사실은 당연히 대다수가 그렇듯 크로포트킨부터 읽었지만, 하여튼 그 다음으로 접한 것이 퀴어 아나키즘이었다. 그때 존재 자체가 부정과 억압의 대상인 퀴어에게는 퀴어에게 내재된 아나키즘에 대한 거대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접했다. 양성애자들이 겪는 억압을 페미니즘이 강조된 아나키스트 관점으로 분석하는 시리 아이스너(Shiri Eisner)의 책 『Bi』에서 읽은 내용이다. 당시 나는 이 내용을 오독해 퀴어가 아나키스트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퀴어 중에서 정말로 아나키스트인 사람은 “아나키즘”의 정의를 아무리 느슨하게 잡아도 서너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중 아나키스트로서 활동하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고 말이다. 물론 내 퀴어 지인 중에는 덜 급진적인 좌파도 있다. 정치는 신경 끄고 그냥 지금 있는 그대로를 즐기려고 하는 비정치적인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 말고도 반페미니즘, 반젠더퀴어, 우익 등 반동적인 성향을 띈 이들도 있다. 이 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를 하려면 둘 다 술병을 마이크로 들지 않고서는 이야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치적 사상이 서로 반대된다. 무엇 눈에는 무엇만 보인다고, 내 기대를 다른 사람에게 헛씌운 것이다. 다행히 아이스너의 글에 대한 내 오독은 덕분에 빠르게 벗어던질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퀴어 운동판을 보면 아쉬움을 느낄 뿐이다.
성소수자 해방은 어지간한 규모의 집회에서 다뤄지는 주제이기는 하다. 언급이라도 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는 그래도 당연히 좋지만, 퀴어 해방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그 악명 높은 “차별금지법” 제정에 집중된다는 것이… 뭐, 하지 말라고는 안 하겠지만, 그들은 정말 법이 제정되면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겪는 두려움을 떨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일까?
하지만 이번 프라이드 축제는 그 말고도 나와 말랑키즘의 다른 아나키스트 동지들뿐만 아니라 다른 퀴어들과 엘라이들에게도 비판의 여지를 제공했다. 우리 퀴어들에게 특히나 중요한 문제인 에이즈 약품에의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다국적 제약회사가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흔쾌히 퍼레이드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뭐, 주최측에서는 어떻게든 해명하려고는 했지만, 돈만 주면 어떤 군주에게든 머리를 조아려도 된다는 뜻인가? 입으로 아무리 친 퀴어적인 말을 내뱉더라도, 중요한 것은 행동이다. 그들의 행동이 퀴어의 권리에 정면으로 반대되는데 이를 아무리 포장한다 한들 그 기만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내가 꿈꾸는 “퀴어 해방”은 내가 퀴어라는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된 세상이다. 그냥 사랑하는 사람이랑 내가 가장 편한 모습으로 꽁냥거리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피곤하게 사랑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현재의 구조와 체계를 유지하면서는 이룰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기에 나는 아나키즘을 추구한다. 아이스너의 말은 퀴어가 아나키스트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거나 자동적인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아나키스트가 된 퀴어는 사회의 억압의 구조를 잘 이해하기에 그만큼 적극적으로 아나키즘을 추구한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자유롭게 사랑하고 싶다는 욕망을 범사회적인 자유와 평등으로 확장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계속해서 억압받기도 싫고 새로운 억압자가 되고 싶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계층으로 나누고,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구분하는 국가와 자본의 울타리 안에 차별금지법이니 뭐니로 포함되고 싶지 않다. 우리 모두를 짓밟는 위계의 군화의 색을 바꾼다고 해서 우리가 짓밟히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우리 퀴어의 존재를 보장받는 방법은 직관적이다: 퀴어 하나를 건드린 이는 퀴어 모두를 적으로 삼은 자다. 우리들 해방은 어디 의석에 우리를 대신하는 자의 뜻에 걸린 것이 아니다. 우리들 손으로 우리를 직접 지켜야 한다. 우리들 손으로 낡은 세상을 화형시키고 새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2022년 7월 17일
‘우리들의 상호부조’, 말랑키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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