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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 사요―제22대 총선 거부와 그 대안을 제안하며

알 수 없는 사용자 2024. 3. 26. 20:46

, 안 사요

22대 총선 거부와 그 대안을 제안하며

 

 

   우리가 틀렸다. 지난 제20대 대선 형보수지 vs. 럭키야붕이 격돌이야말로 국가주의의, 의회주의의 막장 민낯을 더할 나위 없이 또렷이 드러내는 끔찍한 선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렇게 더한 상황에 놓일 줄은 차마 몰랐다. 아무리 비현실은 현실을 이길 수 없고, 바닥 밑에는 지하실이 있다지만, 이건 좀 해도 해도 너무 하지 않은가.

 

   몇몇 정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총체적 난국이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대통령을 위시해 당내 도처에 널린 문제점들을 이 악물고 못 본 척하며 외면하고, 스스로 정한 기준에 미달하는 후보들을 쳐내고도 무소속 출마하는 꼬락서니들을 막을 능력도, 의지도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고작 이 정도 기준과 능력으로 대한민국을 운영하고 있다는 말인가?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사실 이보다 더하면 더 했지 결코 뒤지지 않아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판을 해야 하는지 감도 잘 오지 않는다. 당 대표는 지난날의 의혹들로 법원을 들락날락 하고 있고, 당내에 남아 있는 작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명비어천가를 부르고, 얼마나 멋들어지게 그것을 부르느냐에 따라 아주 공정한 기준으로공천을 하고 있다. 도대체 왜 우리가 , 이재명보다는 윤석열이 정말로 아주 조금이라도 나았나?’하는 쓰레기 같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는 말인가.

   더불어민주당에서 뛰쳐나간 조국혁신당, 소나무당 따위의 정당들은 또 어떠한가. 스스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뭐가 그렇게 억울하다는 것인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얼굴을 들이미는 전직 법무부장관님에게도 소름이 끼치고, 그걸 또 지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한 하늘을 이고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너무나 두렵고 무섭고 절망스럽고, 한동훈을 끌고 와 국감에서 가발을 벗기겠다느니 이민정책을 재고하겠다느니 페미니즘에 편향된 인권위를 전면 개편하겠다느니 하는 얼빠진 소리를 왜 우리가 듣고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냐는 말이다. 어차피 당선과는 천만 광년쯤 동떨어진 것, 우스개로 정치에 지친 사람들에게 웃음이라도 주겠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차라리 소나무당의 공약을 블랙 유머라고라도 이해를 하겠다. 만약 진심으로 저런 이야기들을 한 것이라면, 당신들이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는지를 좀, 제발, 진심으로, 돌이켜 보기를 온 마음을 다해 권하고 싶다.

   그리고 여당과 제1야당의 그늘에서 의석 한 자리라도 어떻게든 비비고 들어가 보겠다는 각종 이합집산 정치 집단들은 어떠한가. 도대체 민주당과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공감하는 바가 있기에 이해를 함께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진보당부터 시작해서 국정농단 사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의 흑막으로 한 정당을 뒤흔들고 농락하며 청년들의 삶을 갈아 넣던 김길오 일파 a.k.a. 기본소득당까지, 제발 소식이라고는 딱 하나만 듣고 싶은 이들이 왜 이렇게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고 더럽히려 하고 있는가. 이런 치들에게 우리의 삶을 내맡긴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너무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 아닌가.

 

   여기까지는 점심부터 순댓국에 소주를 까는 이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우리를 비참하게 하는지, 그래서 의회주의라는 제도에 회의를 느끼게 하는지, 우리 역시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우리들의 상호부조’, 말랑키즘은, 바로 그 이유에서 이번 제22대 총선을 거부한다. 우리의 삶과는 하등 연관 없는 이 막장의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일 뿐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며, 우리 스스로 우리의 생활과 행복을 이룩해 나가자고 다시금 제안한다.

   지난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거부하는 글에 대해 여러 방면을 통해 비슷한 우려의 목소리를 접할 수 있었다. 가장 많은 것은 역시나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는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랑키즘이 이미 여러 자리를 통해 언급하고 실천해 왔듯,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는 차악이 아닌 최선을 요구해야만 한다. 역사는 언제나 최선을 요구하는 과정이 최악과 치열하게 다투는 과정에서 앞으로 나아갔고, 발전해 왔다. 차악을 요구한다는 것은 결국 이 상황이 다시 반복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래서 뭘 할 건데?’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사실 쉬운 문제가 아님을 안다.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정하는 일이 결코 쉬울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 방식은 어렵지만 누구나 아는 것이고,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말랑키즘은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로는 우리 사회를 책임지고 있는 절대다수가 일하지 않으면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는 모두 먹고 살기 위해 일하고 있다. 2024년 현재 대한민국 인구 5,175만 명 가운데 생산연령인구는 약 3,633만 명에 달하고, 경제활동인구는 2,900만 명에 달한다. 이 절대다수의 권익과 복리를 실제로, 눈에 보이게, 또 유의미하게 지켜낼 수 있는 것은 일하는 사람들의 조합, 즉 노동조합뿐이다. 노동조합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누구라도 그래서 노동조합이 있는 회사에 취직하고 싶으신가요, 없는 회사에 취직하고 싶으신가요?’하고 물었을 때 결코 없는 회사에 취직하고 싶어 죽겠다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노동조합이 일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조합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때문에 우리는 우선 일하는 모든 사람이 노동조합을 통해 내 일터를 내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일하고,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그 대가로 얼마를 받을지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결코 국가가, 국회의원 나리들이 법률로 제정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들이 아니다.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사용자에 대해 우리는 그렇게 일 못 하고, 안 합니다라고 말할 때에야 비로소 현실적으로 가능해지는 것이지, ‘사장님들, 오늘부터 사람 죽이시면 안 됩니다? 하하하라고 국가가 이야기한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죽어 나가도 그걸 대충 몇 푼 푼돈으로 퉁 치고 넘어가는 것이 가능한 사회, 그러지 말라고 법을 제정해도 아이고 기업 망한다 나라 망한다아아아아아악!!!’하는 것이 가능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 그런 사회를 아 안 사요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니 말랑키즘은 일하는 우리 모두가 노동조합을 통해 우리 스스로의 안전과 행복을 지켜 나가자고 제안한다.

   둘째는 우리가 열심히 일했으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우리 스스로 어떻게 꾸려 나갈지 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데에 있다. 내 집, 내 방에 내가 좋아하는 영화 포스터를 붙이든, 아무것도 없이 순백의 톤으로 깔끔하게 구성하든 그것은 오로지 나의 선택과 판단이고, 그것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나의 자유이다. 그리고 이것을 확장하는 것이 바로 주된 포인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 스스로 정하는 것, 즉 서울을 예시로 들었을 때 적어도 구 단위를 기준으로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전부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두 번째 대안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구민 전원의 동의로 다른 지역과 협의해야 할 문제들을 논의할 대표자를 선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중앙집권적인 모습으로, 정치의 이해타산으로 해결하려는 국회라는 제도를 반대한다. 국회의원을 선거 때 말고 우리가 본 일이 얼마나 있었던가? 국회의원이 내 의견을 반영한 일이 언제 있었던가? 국회의원이 정말, 진짜로 나와 내 삶과 아주 조그마한 관계라도 있는가? 그렇기에 우리는 국회라는 의회주의를 통해서가 아닌, 더 세부적이고 더 우리 삶과 밀접한 단위에서부터 모든 문제를 직접결정해 나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미 우리는 적어도 구 단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직접 눈으로 보고, 직접 판단할 수 있는 기술적 토대를 갖추고 있다. 간접 투표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투표를 통해서도, 우리 동, 우리 구의 모든 일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 큰 단위가 아니라 더 작은 단위로 나뉘고 나뉘어서 모든 사안을 결정할 때, 모두가 직접 선택한 규칙과 생활양식에 만족할 수 있고,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생겼을 때 더 능동적이고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동네의 일을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지역정당의 설립을 추진하자는 것을 제안한다. 부산의 일을, 광주의 일을, 강릉의 일을, 충주의 일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여의도의 누군가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기 위한 구정區政을 실천하기 위한 길을 한 걸음씩 걸어나가 보자는 것이다.

 

   누군가는 우리의 말이 허황되다고,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이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우리 스스로도 앞서 언급하고 인정한 바 있다. 하지만, 이것이 허황되다는 주장에 우리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내 일터의 일을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정말 불가능한 일인가? 어려울 수는 있어도,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우리 동네의 일을 우리가 직접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한가? 다시 말해서, 송파구 가락동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강서구 화곡동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성북구 길음동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파악하기 어렵고, 직접 결정하기 어렵다는 말인가? 그럴 수 없고, 그렇지 않다. 또다시 이야기하지만, 어려울 수는 있어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우리들의 상호부조’, 말랑키즘은 이번 제22대 총선을 거부하는 것에서 우리의 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거부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그것을 통해 내 삶을 내가 직접 선택하고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더 많은 일하는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 서서 같은 목소리로 우리 일터의 자유와 필요를 이야기할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과 먹고, 마시고, 어울리며 우리 동네의 일을 어떻게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길에, 이 사회를, 이 시간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기를 바라마지 않고, 곧 그렇게 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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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상호부조’, 말랑키즘

고려대학교 아나키즘 소모임 '검은 호랑이'

서강대학교 아나키즘 소모임 '검은 알바트로스'

서울대학교 아나키즘 소모임 '검은 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