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 독하다 독해. 이래도…〉― 대한민국 제20대 대선 결과에 부쳐
깨졌다. 무엇이긴 무엇이겠는가, 어택땅 찍고 의회주의로 닥돌한 모두의 뚝배기밖에 더 있겠는가. 똥맛카레와 카레맛똥 가운데 결국 무언가 하나는 우리 머리 위에 올라섰으니 깨지지 않고서 배기겠는가.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니 어쩌니 하는 말이 많았다. ‘우리들의 상호부조’, 말랑키즘의 대선 거부 프로젝트 역시 이러한 정치 지형과 맞물려 온오프라인을 망라해 여러 관심을 받았다. 물론 호의적인 관심만 있던 것은 아니다. 대선 거부 프로젝트 스티커를 부착하며 돌아다니는 와중에는 누군가 그 옆에 있던 경찰에게 우리를 가리키며 저놈들이 저거 붙였다고 신고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으며, 온라인에서는 민주당 프락치도 되었다가 국민의힘 프락치가 되기도 하였고, 선거법 위반 운운한 고소 고발 이야기는 한두 차례가 아니었으니 굳이 횟수를 셀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가장 안타깝고 쓴웃음이 지어졌던 것은 역시 ‘주체적인 주관을 가지고 투표를 하면 되지 왜 투표를 하지 말라는 거냐’ 운운하던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 주체적인 주관을 가지고 투표한 결과가, 음….
누구 탓을 하자거나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모두를 조롱하거나 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이번에도 우리 스스로 우리의 삶을 직접 설계하고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는 데에 대한 불신의 결과가 이렇게 나타났다는 현상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믿지 않은 결과 대의제는 그 목숨을 또 연장하며 존재 이유를 승인받았다. 그러면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텐데, 그야 명료하다. 의회주의라는 체제가 내 삶을 규정할 수 있다는 믿음, 그리하여 내가 생각하는 최악을, 그러니까 내가 뽑지 않은 그를 누군가 차악이라 부르며 선택해 내 머리 위에 두기는 죽어도 싫으니 그나마 이놈 정도면 내 머리 위에서 나를 조종해도 되는 차악이라며 뽑는 행위, 그리고 다음에는 반드시 내가 선택한 차악을 내 머리 위에 올려두겠다는 기이한 다짐 덕분 아니겠는가. 결국 이 치킨 레이스에서 벗어날 의지 없음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아니, 말은 바로 해야겠다. 이 치킨 레이스에서 벗어날 의지가 있는 이들도 이 게임 말고 다른 게임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다른 세상, 다른 체제는 가능하다. 절대왕정이라는 체제가 지구에서 시효를 다한 지 이제 겨우 100년여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지금 그것이 가능하다고 진지하게 믿는 이가 얼마나 되는가? 100년여 전의 사람들에게 당신이 왕을 선택해서 당신 머리 위에 둘 수 있다고 하면 맛이 갔다고 하지 않았을 이는 또 몇이나 되었겠는가? 이렇듯 다른 체제,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앞서도 말한 바와 이어서 이것을 믿지 않는 이들을 비난할 마음도 없고 조롱할 마음은 더더욱 없다. 다만 간절히 함께 다른 세상을 꿈꾸고 만들어 내자고 호소할 따름이다. 우리가 차악을 고른다는 환상에 빠져 5년마다, 4년마다 한 번씩 축제를 할 때마다 이 체제 자체로 인해 죽어가는 이들의 피눈물은 끊임없이 쌓여간다. 이 체제를 끝내지 못함으로 법이라는 이름 아래 억울하게 쫓겨나고 제 노동의 가치를 제 손으로 정하지 못하는 이들이 쌓여가고, 이 체제를 끝내지 못함으로 법이라는 이름 아래 지금 당장 맞아 죽어가고 있는 옆집 가정폭력 피해자를 돕는 데 망설이게 되고, 이 체제를 끝내지 못함으로 움직임이 불편한 이들도 대중교통 좀 이용하자는 데에 법을 제정하라고, 왜 내 출근길을 막냐고 엄한 분통을 터뜨리고, 그로 인해 피눈물이 쌓여 그 위에서 잔치를 벌이는 우리 모두가 있다.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혁명을 해야 한다. 아나키스트는 모두 사회혁명을 이야기한다. 다만 이는 반드시 무력을 사용하는, 폭력적인 것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 모두가 더 이상 지금의 체제 안 합니다, 하고 셔터만 내리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혁명을 해야 한다. 그저 내가 모실 상전만 갈아치우는 정치혁명이 아니라 모두가 모두를 모시되, 아무도 아무를 모시지 않는 사회혁명을. 때가 되면 누군가는 춤을 추지 못하는 잔치 말고, 언제든 누가 되든 전혀 춤출 수 없는 이가 존재하는 잔치 말고, 정말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할 수 있는, 그리하여 함께 춤출 수 있는 잔치로 나아가자.
이번 대선 결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상호부조’, 말랑키즘은 실망하거나 좌절하는 일 따위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이번 대선을 거부한 한국 유권자 중 12.9%, 정확한 수치로 표현하자면 10,129,839명의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거대한 숫자인가! 말랑키즘이 이들과 함께 더욱 많은 사람에게 대선 거부의 이유, 대의제 거부의 이유,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 모든 억압과 권위의 철폐를 설득하지 못했으니 그 책임은 무겁고 또 무거운 것이겠으나, 그럼에도 비관하지는 않겠다. 우리의 사회혁명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 길에 모두가 함께 하는 날이 머지 않았다는 분명한 사실 한 가지, 이것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